잊혀진 교회 종소리

초창기 한국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와 종탑이었다. 이 마을, 저마을 예배당마다 종탑이 세워져 종탑안에는 교회종이, 종탑 위에는 십자가가 높이 달려 있었다.

내가 어릴적 자란 시골은 50가구가 채 안되는 산골 마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지배배~, 지지배배~ 제비가 지저귀는 소리, 뻐~꾹, 뻐~꾹 뻐꾸기 우는 소리, 종종종종~ 종달새 우는 소리, 꿩~꿩 푸드득, 꿩이 날아 가며우는 소리, 움~매 하고 우는 소울음소리, 왕~왕 개짖는 소리, 밤이면 부~엉, 부~엉 부엉이 우는 소리, 획~하고 부는 바람 소리, 그야말로 소음이라고는 전혀없는 자연의 소리 그 자체였다.

거기에 새벽이나 주일, 수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울리는 교회 종소리가 땡~땡~,  땡~땡~ 청아하게 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 우리 마을의 예배당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우리집 바로 아래, 집터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 예배당은 시골 초가집을 개조한 예배당으로, 예배당 한쪽 편에 산소통을 거꾸로 매달아 놓은 ‘종’ 이 있었다. 나는 어릴때 초등학생적부터 예배당의 종을 쳤다. 나무 망치로 종을 치면 땡~땡~,  땡~땡~, 천~당~, 만~당~(?) 하고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예배당은 중학생이 되기전 어느날 100여 m 떨어진 고 지대로 옮겨 가게 되었다. 당시 침례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대지를 마련하고 그 위에 아담한 현대식(?) 예배당이 세워졌다. 이제 교회 종은 산소통이 아닌 ‘주철주물’ 로 만들어진 종이었다.

인근 군 부대의 지원으로 어엿한 종탑도 세워졌다. 이젠 타종 방법도 망치로 치는 것이 아니라 줄을 매어 종을 당겨서 치는 종이었다. 역시 그때도 나는 종치기 소년이었다. 새벽과 수요일은 아니더라도 주일날 종치는것은 내가 도맡아 했다.

예배시간 한 시간쯤 전에 ‘초종’ 을 친다. 그리고 예배 시작 30분 전에 ‘재종’ 을 친다.

종을 치기전 먼저 종탑 아래서 기도를 드린다. “이 종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하시고 종치는 횟수만큼 예배에 나오게 해 주세요.”

이제는 종소리가 달랐다. 땡~땡~, 땡~땡~이 아니고 땡그렁~땡~,  땡그렁~땡~ 나는 중학생시절부터 장년예배에 참석했다. 논, 밭에서 일하다가 예배하러 나온 성도들은 몸이 곤하여 설교시간에 꾸벅, 꾸벅 졸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목사님의 설교는 더 길어진다. 아마도 안타까워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아직은 어린 중학생이다. 그런 내가 마루바닥의 의자도 없는 예배당에서 오랜시간 앉아 예배드리는 것은 솔직히 무리다. 그렇게 중, 고등 학생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2학년때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를 했다.

육군 보병 훈련과정을 모두 무사히 다 마치고 군인교회 에서 군목 목사님을 만나 상담하고 자대에 배치받은 지 한달만에 ‘군종병’ 이 되었다.

가슴에 ‘군종병’ 마크를 달고 이등병으로서 군종 업무를 수행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군종업무는 사실상 병사가 감당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신병이 감당하기란 더욱 어려웠다. 군종업무는 대략 여섯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주일과 수요일에 예배인솔(군인교회), 각 중대 순회예배, 근무초소와 벽지 근무지 방문, 훈련장 방문, 야간 근무자 방문(GOP에선 온차 돌리기), 병사들 애로사항 파악과 보호병사(관심병사) 동태 파악하여 주1회 대대장에게 보고 등이다.

그 외에 병사들이 취침 하기전 취침기도도 있다. 이런 업무를 수행하려면 각 중대의 중대장, 소대장, 간부(하사관-현, 부사관)등을 상대해야 된다. 그러니 쉽지가 않다. 군대는 계급사회요, 짠밥(?)이 아닌가?

전방의 자대에 배치받은지 1년이 채 안되어 중서부 전선 GOP근무에 들어 갔다. GOP부대는 남방한계선 철책선에서 경계 근무를 하는 부대다. 당시 이 부대 OP(최전방 관측소) 에는 놀랍게도 예배당은 없었지만 종탑이 있었다. 나는 보병 대대 군종병이었다. 당시 대대장(중령)님은 철저한 불교신자 였는데 그런 이유 때문인지 군종병인 나를 은근히 힘들게 했다 그러던 어느날 대대장님이 군종병을 찾았다.

대대장실에 불려간 나는 대대장님으로 부터 하루에 두번, 시간에 맞춰 종을 치라는 지시를 받았다.

타종시간은 점심식사 시간인 낮12시 정오와 저녁식사 시간인 오후 5시다.  뜻밖의 일이었다. 골수 불교 신자로 군종병인 나를 은근히 힘들게 했던 대대장이 아닌가. 아마도 대대장은 오랜시간 외롭게 경계근무하는 병사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고자한 배려심 때문이었으리라!

그때부터 나는 최전방OP에서도 종치는 ‘종치기 군종병’ 이 되었다. OP는 대대 구역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에 우리 병사들이 철책 근무를 서면서 그 청아한 종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우리 병사들 뿐만아니라 전방 GP와 북쪽에 까지도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종소리를 듣는 병사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또 북한의 병사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오늘 그 추억의 교회 종소리가 사라졌다. 사라진지가 오래되었다. 이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아니 이미 잊은지가 오래다. 교회 종소리는 단순히 추억의 소리만이 아니다. 그 종소리는 공허한 사람들의 마음에 위안을 주고,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소리였다. 지금은 아주 외진 시골에서나 그것도 아주 드물게 그 교회 종을 볼 수 있게되었다. 이러다간 언제 그 추억의 교회종이 아예 사라질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한다. 교회 종은 누가 뭐래도 우리 한국 교회의 상징이요, 역사가 아닌가? 혹시라도 아직 시골에 그런 교회종이 보관되어있다면 신학대학이나 신학교에 기증해 주면 어떨까? 한국 교회사에 길이 남을 교회 종이 아닌가. 우리 ‘상수리나무 선교회’ 에도 교회종이 필요하다. 천국환송식을 할때 시간에 맞춰 타종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학교나 이런 특별한 곳에 교회 종이 보전(保全)된다면 우리 후대에게 길이 길이 한국 교회사의 한 부분이 전해질 것이다. 교회의 종소리가 그리워진다. 이젠 추억속으로 사라진 교회의 종소리가 말이다.

2021. 03. 29

福音의 파수꾼
임정수 목사

※註(주)

*GOP(general outpost)
-남방한계선 철책. 남방한계선 철책선에서 24시간 경계근무를 하며 적의 기습에 대비하는 소대단위 초소(최전방 전방초소)

*GP(guard post)
-경계초소. 군사분계선(휴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서 DMZ(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경계초소. 이곳엔 민정경찰이 근무한다(DMZ에 위치)

*OP
-북한 땅이 바라보이는 최전방 관측소(남방한계선 이남의 높은 곳에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