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아버지, 무능한 아들 : 무능한 아버지, 유능한 아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유능한 아버지 밑에는 무능한 아들이, 무능한 아버지 밑에서는 유능한 아들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볼 때 유능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우상숭배하는 가문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상을 타파하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창12:2)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던 아브라함은 마침내 거부가 되고 가병318명을 거느릴만큼 유능한 아버지였다(창3:18, 창14:13~16)

아버지의 생애에 나타난 이런 놀라운 업적에 아들인 이삭은 위축될 수 있었고 아버지의 그늘에 가리워질 수 있었다.

역시나 무능한(?) 이삭은 나이 40이 되도록 장가도 가지 못한다. 이를 보다 못한 아브라함이 늙은 종 엘리에셀에게 미션을 주어 며느리감을 구해오게 한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들이 미덥지 못해 종에게 미션을 준 것이다.

후에 이삭이 그랄에 거주할 때였다. 어느날 블레셋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워 버렸다. 그리고선 아비멜렉이 찾아와 ”네가 우리보다 강성한즉 이 땅을 떠나라” 고 한다. 그런데 이삭은 더 큰 힘을 가졌음에도 저항한 번 하지않고 곧 바로 그 땅을 떠난다.

‘그랄’ 골짜기로 장막을 옮긴 이삭은 그 곳에서 다시 샘을 팠으나 그랄 목자들이 그 샘(에섹, 싯나)을 또 빼앗는다. 이삭은 역시 이번에도 싸우지 않고 빼앗기고 다른 우물을 판다.

이삭은 어떤 경우든 오직 기도만 한다. 그래서 그는 늘 기도하고 묵상하는 묵상의 사람으로 큰 응답(창26:12~14, 창26:18,19창26:20~22)을 받았지만 뭔가 모르게 2%부족하게 느껴진다.

최소한 아들 야곱의눈에는 그렇게 비춰졌다. 그래서 어쩌면, 야곱은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는지 모른다. 야곱은 참 욕심이 많았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목적을 위해서는 인본주의도 서슴지 않는다. 가족이건 남이건 속이고 빼앗으며 자기 배를 채웠다.

그런 아버지를 둔 요셉의 눈에는 아버지 야곱이 유능하게 비춰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 그늘에 묻히지 않고 어려서부터 언약의 꿈을 갖고 일심, 전심, 지속으로 기도했다. 그래서 모든 어려움도 묵묵히 이겨낼 수 있었다.

모친의 죽음, 형들의 시기, 죽음의 위기와 억울하게 노예가 되고 누명을 쓰며 감옥에 가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을 축복하셔서 당시 애굽까지 정복하게 하셨다.

흥선대원군(이하응)은 조선의 왕족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 살아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고종의 섭정을 맡는다. 그는 왕의 자리에 오른적이 없었으면서도 살아있는 왕의 아버지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른다.

고종은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10년 동안이나 받는다. 그때 고종은 참으로 나약한 모습일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권력을 흥선대원군이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유능한 아버지였다. 가난한 가계(家計)를 근면함과 부지런 함으로 일으켜 세워 부(富)를 이룩했고 시골에서는 내노라하는 유지가 되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율법적이고 가부장적이어서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어깨를 펼 수 없었고 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라야 했다.

결과 나는 내 아들들에게 무능한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내 아들들은 달랐다. 무능한 아버지를 기대할 수 없으니 그들은 스스로 강해졌다. 덕분에 그들은 오늘 성공적으로 사회생활을 잘 하고 있다.

기우(起憂)일까? 이런 염려 아닌 염려가 생긴다. 장차 올 나의 손자들은 혹 무능한 사람이 되지 아니할까 말이다. 부자(父子)간의 강약, 약강은 이렇듯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나 대체적으로 그렇게 나타난다.

그러나 강함과 약함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이다. 복음가진 언약의 백성은 후대에게 언약을 전달해야하며 영적인 유산이 후손에게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요셉으로 전달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