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본다” “제단 쌓는다”는 말은 맞는 말인가.

우리 한국 교회가 예배 호칭에 대하여 반드시 고쳐야 할 말은 “예배본다”라는 말과 예배 행위를 “제단 쌓는다” 라고 표현하는 말이다. 그 중에 “예배본다” 는 말은 한국교회 선교 초기부터 우리의 언어 습관 속에 정착된 말이다.

예컨대 술버릇을 “주벽”(酒癖)이라 하고, 남의 것을 훔치는 버릇을 “도벽”(盜壁)이라고 하며, 습관적으로 쓰는 말버릇을 “구습”(口習) 또는 “어벽”(語癖)이라고 한다. 이와같이 예배에 “본다”라는 말을 합성시켜 쓰게 된 것은 언어관습으로 일종의 어벽이 된 셈이다.

원래 “본다”(보다)라는 말은 시각으로 사물의 모양을 알거나, 어떤 대상의 내용이나 상태 등을 알려고 살피는 것, 사물의 미적 요소를 즐기며 감상하는 미적지각(美的知覺)에 쓰는 말이다.

“예배본다” 라는 말은 교회사적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1777년(정조1년) 가톨릭에서부터 1865년 개혁교회(개신교) <토마스>의 선교로 이어져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 등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의료와 교육, 예배 등이 시행되면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예배가 “경이로운 일” 로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대원군 시대와 그 직후까지 종교에 대한 박해와 인명이 희생되는 사건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교회 출석이나 신앙을 선뜻 가지려 하지 않고 관망하고 있을때 먼저 교인(입교)된 신자들이 전도 방법으로 “주일” 혹은 “특별집회” 의 ‘예배하는 것’ 이 볼만하고 재미가 있고, 서양인 선교사가  왔으니 “구경하러 가자” 라는 뜻으로 “예배보러 가자” 고 한 말이 전래(傳來)가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반응으로 “보는 것” 이 될 수는 없다. 만약 “예배본다” 라는 호칭 사용을 계속 방치한다면 예배자는 “예배
참관자”(예배 관람자) 또는 “예배 구경꾼” 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제단” 이나 “쌓는다”라는 말은 구약적인 용어로서 그리스도로 부터 열려진 신약교회의 표현은 아니다. 이 “제단” 이라는 말의 구약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 (창25:22, 17:15) 였고, 제물과 화해를 받으시던 곳이었다.

원래 “제단” 의 또 다른 의미는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귀한 희생을 치르실 것을 예표(豫表)한 곳으로서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 이 없다” 는 사실을 선포해 주던 곳이 제단 이었다 (히9:9,22). 그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제물도, 피흘림도, 제단도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신약교회는 제단이 요구되지 않았으며, 초대교회도 실제로 제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단 쌓는다” 라는 말을 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상으로나 신약교회의 예배원리에서 보아 잘못된 것이다. 제물이 없으니 제단도 없고, 제단이 없으니 “쌓는다는 것도 필요없기 때문이다.

오늘 “제단을 쌓는다” 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주로 “신흥교단” 들, “사이비 종파”, “무속풍의 기복신앙인과 지도자들”, “미신적 불건전 신비주의자들” 등인데 이들은 “가정제단”, “새벽제단”, “구국제단”, “민족제단”, “피의 제단”, “불의 제단”, “능력제단”, 등과 교회당 내의 소 예배실을 “○○제단”, 그리고 “○○산 제단” 등의 이름을
걸고 제단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여 가진 재산을 바치게 하거나 헌금을 강요하여 성경이나 교리보다는 자신의 체험이나 개인의 은사를 더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10:18절 “이것들을 사(赦)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말씀한 이후에는 제단은 요구되지 않고, 제물이 없으므로 “쌓는다” 라는 “제의(祭儀)적 구조” 나 “제물의 조성” 이 전혀 요구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예배본다” 나 “제단 쌓는다” 는 말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맞는 말이 아니므로 가장 성경적인 “예배한다”로 갱신되어야 한다.

2021. 12. 27(월) 아침

福音의 파수꾼
임정수목사

※참고도서 – [교회용어 바로쓰기] 김석한저, 대서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