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을까. 죽음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이 세상의 그 어떤 책도, 종교도 명확한 답을 주지는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여기에 답을 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의해 땅의 흙으로 지음받아 하나님의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생명체가 되었다고 말씀한다(창1:27) 즉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 영적인 존재로 창조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도록 지음받았으나, 사단에게 속아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창1:28, 창3:1~6) 하나님을 떠나니 공중의 권세를 잡은 마귀에게 장악되어 마귀의 종으로서 우상숭배하게 되고, 우상숭배하니 정신병, 각종 육체의 모든 질병이 다 찾아 온다.

그러다 어느날 예고없이 죽음이 찾아오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 지옥의 나락에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수순은 당대에 끝나지 않고 그 자녀와 후손들이 대대로 받게 된다. 이것이 정해진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하나님은 이 문제해결을 위해 이 땅에 참선지자요, 참제사장이요, 참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셨다.

성경은 죽음을 ‘혼’ 이 떠나는 것이요, ‘세상’ 을 떠나는 것이라 말씀한다(행5:5,10빌1:23, 딤후4:6) 세상을 떠나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례를 치르고 나면 돌아가신 그 분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

15년전, 어머니 오정순 권사님이 84세의 일기로 돌아가셨을때 어머님이 섬기던 교회의 젊은 부목사님이 오셔서 천국환송식를 집례하시며 예배를 인도하셨다.

예배중에 그 목사님은 오권사님은 믿음으로 천국에 가셨지만 이 땅에서 다시는 얼굴을 뵐 수 없게 되었다고 시간 시간마다 말씀하셨는데 그때 그 말씀이 마음에 다가 왔다.

그랬다. 그 어머님은 천국환송이후 아무리 보고 싶어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자녀와 가족들이 마음
에 담아야 할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천국과 지옥, 또 천국과 이 땅은 서로 왕래할 수 없기에 효도는 부모님이 살아 계실때만 가능하다. 때늦은 후회는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살아 계실때 한 번 더 찾아뵙고 전화라도 드려야 한다.

죽음은 인간의 ‘장막을 벗는 것’ 이다. 초대교회 목회자인 베드로나 바울도 이 사실을 고백한다 (벧후1:14, 고후5:1) 우리 인간의 장막은 흙으로 지어졌다. 흙으로 지어진 집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진다. 수명이 그리 오래 가지도 못한다.

장수하여 120, 아니 150의 수한(壽限)을 누려도 유한 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인생은 ‘시한부 인생’ 이기 때문이다(히9:27)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요, 새로운 시작이다(빌1:23)

죽음은 잠자는 것이다. ‘잠’은 깨어 나는 것을 전제한다. 성경은 나사로가 죽었을때, 그리고 스데반 집사가 죽었을때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잠잔다’고 말한다(요11:11, 행7:60) 성도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고전15:13,14)

성도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끝이 아니기에 부고(訃告)라는 단어는 적합하지가 않다.

부고는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글’ 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인(故人)이란 단어를 사용해도 안된다. 고인은 ‘죽은 사람’ 이라는 뜻이다. 근조(謹弔)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안된다. 근조는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삼가 슬픈 마음을 나타낸다’ 는 뜻이기 때문이다.

망인(亡人), 망자(亡者), 영면(永眠), 명복(冥福)같은 용어를 사용해도 안된다. 망인, 망자는 ‘망한 사람’ 즉 ‘죽은 사람’ 이라는 뜻이요, 영면은 ‘영원히 잠을 잔다’
는 뜻으로 죽었다는 말이요, 명복은 ‘죽은 뒤에 저승에서 받는 복’ 이라는 뜻으로 우상숭배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은 왜 죽게 되었는가? 성경은 그 이유를 죄의 결과라고 답한다.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선악과의 언약을 주셨다. 어느날  아담은 일방적으로 하나님 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선악과를 따 먹는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창2:17)

이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삼하14:14) 문제는 그 어느 누구도 그 죽음의 때, 개인의 종말을 모른다는 사실이다(창27:2) 그래서 건강할때 건강도 챙겨야 되지만, 임종도 준비 해야 한다. 임종을 준비하지 않으면 ‘준비된 죽음’ 이 아닌 ‘당하는 죽음’ 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상(喪)을 당했다’ 고 하는지 모른다. ‘당하는 죽음’ 이 아닌 ‘맞이 하는 죽음’ 이 되어야 한다. 그게 ‘웰다잉(well-dying)’이다. ‘웰다잉’하려면 ‘웰빙(well-being)’ 해야 된다.

웰빙은 뭔가. ‘메멘토모리 (Memento Mori)’ 하는 것이다. 메멘토모리는 ‘언젠가 맞이할 임종을 기억 하고 사는 것’ 이다. 나는 지금도 메멘토모리 학교에서 열심히 그 날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없는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면서(계21:4)…..

2021. 03. 26

福音의 파수꾼
임정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