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를 힐링캠프로, 축제로!

그리스도인의 장례는 더 이상 슬픔의 대상도, 거부할 대상도 부정할 대상도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부활의 소망과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우리나라도 축첩제도가 있었다. 외도도 많았다. 동네 아낙네들은 냇가나 동네 우물의 빨래터에서 각자의 억울함과 서러움에 방망이질을 했다.

방망이로 빨랫감을 두들겨 팰때 남편을 두들겨 패는 심정으로 아예 난타 공연을 했다. 그러면서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각자 마음속에 담겨있는 울분을 토로했다. 장단에 맞추어 빨랫감을 두들겨 패는 것은 그야말로 난타공연이요, 뮤지컬이었다. 그래서 빨래터는 아낙네들의 ‘마실’이요, ‘치유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살만한 세상이 되면서 세탁기가 집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길이 막히면서 여성들의 항우울제 복용이 늘기 시작했다. 시집살이가 아무리 맵고 서러워도 눈물을 보였다가는 시어머니한테 혼줄이 나니 마음대로 울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동네에 상(喪)이 나면 앞서 달려갔다. 상가(喪家)에 달려가 그동안 쌓아놓았던 서러움의 보따리를 풀고 대성통곡을 했다. 그래도 누구하나 말릴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실컷 울고나면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리면서 마음이 가뿐해져 ‘힐링’이 되었다. 그야말로 ‘상가’는 ‘힐링캠프’ 장소 그 자체였다. 그 뿐인가?  ‘상가’에서는 돼지를 잡고 막걸리를 받어다 풍성한 동네 잔치를 벌렸다.

그때는 지나가는 ‘객’도 들러 배를 채웠고, 가난에 찌들어 굶주린 마을 사람들도 모처럼 허기진 배를 채웠다. 마을 사람들로 북적대니 덩달아 동네 개들도 경사난줄 알고  좋아서 껑충껑충 뛰며 놀았다. 이때 마당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멍석을 깔아놓고 밤새 화투놀이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상여가 동네 마을 어귀를 돌아 나갈때까지 불러지는 노랫가락은 구슬프면서도 ‘힐링’이 되고, 웰다잉(Well-dying)을 넘어선 힐다잉(Healing+dying)이 되었다. 힐다잉의 핵심은 ‘용서’와 ‘화해’다.

일상의 축제, 축제의 일상 그게 장례다. 한국 영화의 거장 임권택 감독은 장례를 굳이 ‘축제’라고 명명한다. 이화여대 명예석좌 교수인 이어령은 희랍어에서 온 단어 자궁(Womb:움)과 무덤(Tomb:툼)은 놀라웁게 닮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태어나는 것이 곧 죽음을 향한 것이고, 죽음은 언제나 새로운 탄생’이라는 것이다.

장례는 일상의 축제요, 축제의 일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으로서 장례를 더 이상 거부하거나 터부시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슬픔으로 종결(終結)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고, 천국의 소망이 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힐링캠프로, 축제로 승화(昇華)시켜야 한다. 장례식장을 ‘천국 환송식장’으로, 장례식을 ‘천국 환송식’ 으로, 근조기가 아닌 ‘부활기’로, 상복이 아닌 ‘가족예복’으로, 수의가 아닌 ‘천국예복’으로 바꿔서 본향가는 Home Coming day가 초상집이 아닌 잔치집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분위기는 어둡고 침침함이 아닌 밝고 산뜻한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전15:13)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0)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가 다시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